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문단 편집) ===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과 [[멸망]] ===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으로 나치 독일은 사실상 멸망했으나 그 껍데기는 며칠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4월 20일,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맞고, 4월 29일 자살 하루 전에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퓌러 자리를 총리와 대통령으로 나누어 총리직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대통령직은 [[카를 되니츠]]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 곧 괴벨스가 히틀러의 뒤를 따라 자살하면서 얼떨결에 나치 독일의 수장이 된 되니츠는 자신의 사령부가 있는 [[덴마크]] 인근의 [[발트해]] 군항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구성했다. 다른 [[나치]] 고관들과 마찬가지로 되니츠는 서방과 단독 강화를 맺고 소련군과는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은 독일의 주권은 보전하되 서방과 소련 모두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선행조건으로 하기로 합의했고, 단지 항복 이후 처리에 대해서만 논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는 되니츠의 망상에 불과했다. 5월 4일 되니츠는 자신의 부하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사령부로 보내 항복 협상을 개시했으나,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협상을 질질 끌었다. 다만 이것은 독일이 무슨 협상력이 남아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독일군 장병이나 독일 민간인들이 소련군이 아니라 서방연합국 관할 지역으로 도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서로 이 문제에 대해 협의까지 했던 연합국 측에서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서방 측으로 도망 오는 독일군은 발포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그리하여 5월 7일 [[랭스]]에서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다만 서명이 랭스 현지 시각으로 새벽 2시 30분에 이루어지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이게 [[모스크바]] 기준으로는 새벽 4시 30분의 일이라 소련 본국에서 훈령을 보내줄 만한 수뇌부들이 모두 자고 있었던 것. 사인을 안 하면 소련이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다고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허가 없이 사인하면 서방연합국 주도의 항복 조인식을 인정한 셈이니 어느 쪽으로 결정하건 매끄러운 해결책은 아니었다. 만약 스탈린이 이것 때문에 분노할 경우 최소 [[굴라그]] 행이요, 재수 없으면 [[처형]]까지도 갈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 파견 나왔던 소련군 연락장교 이반 수슬로파로프 대장은 고민 끝에 결국 서명에 참여했다. 다행히 모스크바에서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일단 전쟁이 이렇게 끝난 셈이 됐다. 다만 스탈린은 어찌됐건 전쟁을 이끈 국가로써 독일의 항복을 직접 받고 싶었는지 '''"항복은 적국의 수도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며 베를린에서 다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다음 날 독일의 수도이자 주코프의 사령부가 위치한 베를린에서 다시 동일한 항복 문서에 대한 조인식이 열렸다. 이번에는 [[빌헬름 카이텔]]이 독일을 대표하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소련을 대표하여 조인하였다. 물론 이전에 결정된 항복을 소련이 다시 추인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그 하루 동안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뭘 하지는 않았다. 이런 결과는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연합국만을 상대로 항복 협상을 진행하려던 독일측의 계획[* 항복을 통해 서방연합국과의 전쟁을 일단 끝내고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소련군을 밀어내거나, 서방과 먼저 합의했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소련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던 듯하다.] 때문이었다. 문제는 소련군은 1000만에 가깝고 독일군은 100만 이하인 데다 이미 수천 만을 갈아넣어 좀 더 죽어도 감수할 만한 상황이던 소련이 서방과 휴전하고 그쪽 병력을 투입해서 전력으로 저항하는 정도를 크게 의식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저항한다고 쳐도 결국 소련에도 무조건 항복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게 뻔했고, 둘 다 항복으로 끝내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플렌스부르크에는 서방 연합국이 들어왔고, 당시 서방측은 되니츠 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슈츠슈타펠]] 대원이 미군 트럭의 교통정리를 하고, 독일군과 미군이 함께 정부청사의 경비를 서는 기묘한 광경이 10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2,900만 명이나 사망해서 전범들을 철저히 처벌하려고 이를 갈던 소련은 이런 행태를 참지 못하고 서방연합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방연합국과 소련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기로 합의하고 5월 23일 각료들을 체포, 전범 혐의자들은 기소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다만 나치 독일의 구성원들 중 전범 수준이 아닌 일부는 서방과 소련에 의해 새로운 정부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나치 물이 독일에서 완전히 빠진 게 1970년대 이후인 이유도 이들까지 영향력을 상실하고 정계에서 사라진 시점이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